타오르나 전해지지 않는
태어난 이래 섭소전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단어는 하나였다. 불운. 사시사철 습하고 어두운 서포주 날씨가 건강을 나날이 악화시켰다. 기저에 깔린 감정이 비웃음이든 걱정이든지 간에 주변에선 계절마다 한 번씩 요양을 권했다. 부친의 가계는 오운진에서 대성한 상가였고 모친의 손에는 종문의 장부가 들려 있다. 마음만 먹으면 맑고 선선한 동원주 한복판에 채광 좋은 별장을 장만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화제가 올라올 때마다 소전은 주변에 보이는 물건을 아무거나 집어 던졌다. ‘네놈들은 아무것도 몰라!’ 닳고 닳은 말버릇이었다. 죽은 사람도 일으켜 세운다는 단약이나 잘못 건드리면 그대로 가루가 될 고서적, 백 년에 한 번 필까 말까 싶은 꽃까지 팔황의 웬만한 보화가 전부 수중에 들어왔으나 개중에서 자신이 바란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진정 원하는 게 생기거든 기어코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갔으므로.
첫째로 건강이다. 막힌 기혈이 뚫리면 주변 인물들이 으레 그렇듯 수행의 길을 걷고 싶었다. 이유나 논리 따위 없었다. 명분 없이 단지 원하는 마음만으로 날카로이 벼려온 소망이었다. 두 번째가 바로 연심이다. 마음을 자각한 열일곱 소년은 탄식했다. 내가 전생에 대죄를 지은 모양이다. 사랑할 사람이 없어서 저런 짐승 놈에게 반하다니! 열이 끓어올라 손가락 하나조차 까딱하지 못했던 나날. 정신만은 맑았다. 혈자리가 막혀 썩은 피를 토하고 식은땀보다 차게 식은 몸뚱이를 이불 속에 쑤셔 넣거나 베개를 쥐뜯으며 차라리 죽이라고 저주하던 때에도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현음곡의 수사들이 으레 그렇듯 그 역시 교활하고 음습해 머릿속으로는 천하를 뒤흔들 계책을 세웠다. 기실 몸이 받쳐주기만 했더라면 시대의 그늘에서 난세를 뒤흔들 폭풍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천에 널린 흔한 재능만으론 팔황의 천겁을 견디기 턱없이 부족했지만. 오랜 병환으로 식견이 좁아졌고 질투와 시기가 사고방식을 굳혔다.
막연히 모든 게 잘 풀리리란 가정에 안주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병약한 골육에 차마 불태우지 못한 울화만이 남았다. 평생 해소되지 못할 원념, 삶의 한계를 인정하는 대신 빳빳하게 고개를 치켜들게 만드는 자존심. 화가 치밀면 머리에 열이 올랐고 신진대사의 흐름이 뒤집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이 안 나오니 서책을 잡았고 창을 들을 힘이 없으니 독과 약을 배웠다. 고스란히 골방서생으로 남았다면 언젠가 왜 이렇게 태어났어야 하냐는 질문을 멈추고 평화로운 여생을 보냈을지도 몰랐겠으나. 오랜 인연이 저를 붙들어 맸다. 흰 독사가 발목을 물고 놓아주질 않았다. 사랑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며 섭소전은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어떻게 사마계의 마음을….
춘앵방에서 수소문한 연지를 선물하고 다쳤다는 소식을 들으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갔는데 의도를 눈치채기는커녕 매번 뜬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놓던 것이다. 어제도 그랬다.
“자리에 있나.”
“너… 너! 함부로 들어오지 말랬지!”
“멋대로 쫓아다니는 주제에 자기 공간은 지키려 하나.”
“윽.”
말하는 동안에도 소전은 재빨리 눈을 굴렸다. 웬 산골짜기에서 요수를 퇴치하고 왔다던데 다친 곳은 없는지. 모르는 사이 더 높은 경지에 올라, 혹시라도 훨훨 떠날 기미가 보이진 않는지.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으니까. 그런데 왜 한밤중에 들이닥친 거야. 병자의 머리카락은 힘이 없고 탁한 빛깔이었다. 눈 밑 피부는 검은 그늘이 내려앉았고 피부가 창백했다. 잠자리를 준비하던 차라 향유 바른 빗도 분첩도 화려한 장신구도 모조리 찬장 안에 넣어 두었으니 민낯으로 연모하는 대상을 마주한 셈이다. 하여간 무신경한 여자.
“물을 게 있다.”
“…뭐.”
“지금껏 준 선물들 말이다.”
“…….”
“언제나 애타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지. 아껴둔 보물을 빼앗긴 것처럼, 억울함을 털어놓지 못하고 속만 타들어 가는 마냥. 하지만 정작 운을 떼면 입을 꾹 다무는군.”
“네가… 말을 한다고 들어? 결국 자기 멋대로 행동할 거면서. 그런 상대에게 말하는 의미가 있냔 말이다. 가 닿지 못하고 흩어질 문장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지병은 섭소전에게 체념을 가르쳤다. 이루어지지 않을 일은 시도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막연한 희망에 거는 도박은 질렸다. 확신을 얻기 전에는 행동하기 싫었다.
“소전.”
“…….”
“오직 전한 것에만 의미가 있다. 네가 무얼 원하는지 침묵하는 이상 나는 알지 못해. 몇 번씩 설명했고, 못 알아들을 머리는 아닐 텐데.”
대본에라도 쓰인 것처럼 소전은 대화가 딱 여기 닿는 순간 언어를 포기했다. 다음은 불운을 곱씹을 차례였다. 온 세상을 미워하는 성미로 유일하게 싫지 않은 상대는 지독할 정도로 단순하게 세상을 살았다. 힘으로 뭉뚱그린 세상에서 사마계의 시선은 단 한 번 제게 닿은 적 없었다. 시퍼런 눈동자는 푸른 하늘만 올려다보아서 팔황의 무엇도 그를 붙잡지 못할 것 같았다.
개념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에게 불안을 설명해서야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마계에게는 행동만이 기준이자 단위였으나 섭소전에게 언행은 표면에 올라온 빙산의 일각. 맥락을 읽는 첫 단추였다. 신경줄 굵은 인간과 대화하는 법을 모르기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감 없이 진실을 전해도 존재하지 않는 속뜻을 좇으며 전전긍긍했다. 부끄럽다고 도망치기 일쑤였고 상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수마자 나찰녀가 평생 구가해 온 질문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소전에게 수행이란 그저 현음곡에 소속된 자로써 가치를 증명하려는 발버둥에 불과하므로.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 있는 방은 겉으로만 한 공간이었을 뿐 전혀 다른 층위였다. 그걸 아는 건 사마계 한 사람만이었다.
“너야말로, 내가 미련한 놈인 줄 알면서 오늘은 왜 온 거야.”
“그래. 물으려던 게 있었지. 너는 날 염려하나?”
“……”
그럼 내가 지금까지 한 건 공갈이고 협박이냐! 여느 때처럼 섭소전은 붓이며 서책이며 다기까지 눈에 보이는 물건을 모조리 집어던졌다. 일일이 피하며 사마계는 말한다. 오늘은 상태가 좋아 보이는군. 그게 또 소전의 속을 뒤집어 흔들었다. 대체 무얼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사마계의 마음을 되돌려 놓을 수 있는가. 심란한 마음을 부여잡고 비 내리는 창문을 내다보면 어김없이 계의 얼굴이 보였다. 선맹에서든 현음곡에서든 그가 어디 서 있는지부터 살폈다. 지금이야 무대 위 나찰녀를 올려다보는 처지이나 반대였어도 자신은 언제고 군중 속 사마계를 찾아냈을 것이다. 계와 대화를 나누던 키 작은 수사가 자신을 돌아보는 듯하더니 달음박질하여 물었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혹시 사마 수사님을 좋아하시나요?”
“……”
기절을 직감한 소전은 안간힘을 쥐어짜서 답했다.
“대답 안 해. 절대 안 해. 아직, 아직…”
본인한테도 직접 전하질 못했으니까… 여기까지 말하자 암전. 멀거니 급사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